글
주례사
김태정 목사10:10하약 6분 분량
신랑의 아버님 되시는 장세문 목사님의 경륜과 인품에 비추어 볼 때, 오늘 주례는 제가 아니라 다른 고매하신 분께서 맡아주시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참으로 송구스럽고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가에서 저로 하여금 이 결혼을 주례토록 초청해 주신 것은 이 두 사람이 어떻게 오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는지 잘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이 일을 처음부터 섭리하신 ‘헤세드’의 하나님을 증거하고, 자랑해 달라는 배려였다고 감히 생각해 봅니다.
이 두 사람의 만남은 그야말로 한 편의 감동의 드라마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요? 그 모든 이야기를 다 드릴 수는 없고, 저와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한 부부의 반응을 소개해 드리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합니다. 오늘 이 결혼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이 부부가 너무나 감동을 받았다며, 지난 주 아주 값비싼 넥타이를 들고 와서, 오늘 이 결혼 주례 때에 메라고 주는 것이었습니다. 바로 지금 메고 있는 이 넥타이입니다.
신랑과 신부에게 묻습니다. 지금 정말 행복하십니까? 얼마 전 신부가 저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지금 너무 행복해서 오히려 불안하다고 말입니다. 혹시 이 행복이 깨지면 어떡하나 하고 말이지요. 옛날 ‘욥’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신부의 이런 걱정은 과연 온당하고 타당한 것일까요?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스스로에게 결혼 생활에서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 언제였냐고 물어보면 십중팔구는 결혼식과 결혼 첫날밤으로 꼽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결혼 내내 한 번도 감격스러운 순간이라고는 없었다고 답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든 두 경우 모두 제대로 된 결혼생활을 했다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결혼은 완성이 아니라 이루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영어권에서는 결혼과 관련해서, 우리처럼 “언제 결혼했습니까?”라고 묻지 않습니다. 대신에 “얼마나 오래 동안 결혼을 해왔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니까 부부는 살아가면서 결혼식이나 첫날밤의 감격과 흥분보다 “더 큰 일”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할 때 결혼은 파경을 맞이하게 됩니다.
결혼생활에서 장차 일어날 “더 큰 일”은 무엇일까요? 자녀를 출산하는 것입니까? 전셋집에서 내 집을 장만하는 것입니까? 작은 집에서 큰 집으로 옮기는 것입니까? 직장에서 승진을 하는 것입니까? 가계 수입이 증가하는 것입니까? 자녀 결혼시키는 것입니까? 가장 중요한 한 가지가 빠졌습니다. 상대를 알아가는 즐거움입니다. 함께 살아갈수록 서로를 더 잘 알고 이해하게 되고, 그래서 상대에 대한 배려와 애정이 더 깊어지게 되는 것 말입니다. 물론 현실은 그 반대의 경우, 즉 실망과 미움의 골이 깊어지는 경우가 더 많을 것입니다만, 어느 경우든 결혼을 하지 않고서는 결코 경험할 수 없는 “더 큰 일”임에는 분명합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신부 이스라엘과 신랑 ‘야훼’의 결혼이라는 ‘알레고리’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출애굽”은 그 자체로서 시작이었지 끝은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더 큰 일”이 이스라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은 많은 일들을 준비해 두셨습니다. 광야에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하셨으며, ‘시내’ 산에서 율법을 주셨고, 그 율법에 기초한 장막 예배를 제정하셨으며, 새로운 땅에 대한 희망과 약속을 주시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일들이 이른 바 “더 큰 일”을 위해서 마련한 장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이런 장치를 통해서 그들의 신랑을 더 알아가는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불행하게도 결혼 첫날밤, 즉 “출애굽”의 감격보다 더 큰 감격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하고 답보와 정체를 거듭하다 결국 자멸의 길을 걸어가고 말았습니다. 결혼이 파경에 이른 것이지요. 결혼은 이루어가는 것이지 그것으로 종착역에 골인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 번 확인되는 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나다니엘’은 조금 전 예수님을 만나 충격과 감격으로 놀라운 고백을 드린 바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49절). 그의 간증과 고백은 실로 완벽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치고 이보다 더한 지식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예수님은 이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50절). “더 큰 일”이란 게 무엇입니까? 예수님은 이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51절). ‘나다니엘’이 제대로 다 이해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그는 예수님과 동행하면서, 그분과 먹고 마시면서, 그분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고 그분이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지금 그가 경험한 것보다 “더 큰 일”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삶은 化石처럼 정체되고, 무미건조한 것이 아니라, 생기발랄했고, 역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더 큰 일”이 ‘나다니엘’ 한 개인에게만 국한될 수 있겠습니까! 교회 즉 신약의 모든 聖徒는 예수님의 신부입니다. 신부는 첫날밤의 경험과 같은 과거의 추억만을 먹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성도가 과거의 구원의 감격만을 먹고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두 사람도 오늘의 감격만을 되새기며 살아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오늘 결혼을 시작으로 늘 새로운 간증과 고백을 창조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차원의 인생을 함께 경험하며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되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10:10하). 벌써부터 흥분이 되지요?
저는 오늘 정말 행복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두 사람을 축복하고, 우리 아름다우신 하나님 아버지를 높이고, 자랑하기 위해서 이 자리에 섰다고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결혼 생활에 대해서 훈계하고, 충고하며, 한 수 가르쳐 주기 위해서 선 것이 아닙니다. 이들이 자식으로서, 아내로서, 남편으로서, 그리고 가족과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한 국가의 시민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이 두 사람이 저보다 오히려 더 잘 알고 있기에, 이에 관한 충고는 진부하기만 할 것입니다. 신부는 얼마 전 저에게 자신의 각오를 들려준 바 있습니다. 새 부모님에게 ‘룻’이 되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부족하기 짝이 없는 자신을 아내로 맞아준 남편에 대하여 너무 고맙다는 말도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신랑은 이런 신부의 손을 잡아주며, 앞으로 내가 당신 인생의 ‘보아스’가 되겠노라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고 하객 여러분, 과연 이 두 사람의 아름답고도 눈물겨운 ‘헤세드’의 약속이 지켜질까요? 한 사람의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는 그 사람의 과거 행적을 바탕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참으로 신비하고 오묘한 방식으로 이 두 사람을 오늘 우리 앞에 보여주시기 위해서 역사해 오셨던 그 하나님, 앞으로 “더 큰 일”을 펼쳐 가실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것입니다. 믿으십니까? 아멘! 이제 우리가 앞으로 그 일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런 뜻에서 이제 두 사람, 서로 하나님과 우리 모든 증인들 앞에서 “그 큰 일”을 위한 서약을 나누시기 바랍니다.
축복 기도
자비하신 주님, 주님께서 처음 베푸신 기적, 가나의 잔치 때가 아니었습니까? 오늘 아버지께서 처음부터 완벽하게 계획하셨고, 여기까지 인도해 오신 두 사람의 결혼에 대해서도 기쁨의 포도주를 마음껏 쏟아 부어 주심을 알고 주님께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두 가정
하객들
이웃과 나라
교회
원문을 살려 옮겼고, 오타와 연락처만 정리했습니다.